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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후

열흘 사이에 이삼일 간격으로 세 번에 걸쳐서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가을에 잎이 지고 나면 참나무 일색인 앞산은 그저 바위처럼 무표정이었는데 이번 비가 생명을 불어넣은 듯이 눈을 번쩍 뜨고 막 기지개를 켜는 느낌이다. 이제 산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자연이 인간의 일생과도 같은 태동에서 성장, 결실과 조락의 한해살이를 위해 잠에서 깨어나 숨을 고르기 시작하는 지금, 봄비 후 연두빛이 감도는 산을 보면 내 몸 구석구석 어딘가에도 마치 싹이 돋는 듯한 근질거림이 느껴지는데, 자연의 시간표에 익숙해진 듯 싶어서 과히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초막골의 풍경 2026.04.11

연복초

작고 여린 풀들의 생존방법은 단순하다. 일단 숫자가 많아야 하고 또 크고 힘센 경쟁자가 나오기 전에 재빨리 꽃 피우고 씨앗을 앉혀서 후손에게 넘기는 전략이다. 냉이, 꽃다지, 꽃마리 등 작은 개체들은 종류도 워낙 많아서 다 알기는 힘들지만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들도 꽤 되는 편인데 오늘 또 처음 보는 신비한 풀꽃을 만났다. 호두나무 밑 습기찬 경사지에 무리지어 핀 연복초 꽃, 가녀린 줄기 끝에 욕심 많게도 다섯 송이의 꽃을 소복이 매달고 있는데 꽃마다 연노랑 꽃잎 네 개가 펼쳐져 있다.

초막골의 꽃들 2026.04.08

매화, 만개하다

삼월도 꼭 하루만 남기고 있는 오늘 여기 초막골에도 매화가 만개했다. 여느 해와는 달리 유난히 꽃송이들이 크고 화려해서 회갈색으로 단조롭던 산골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진 느낌이다. 매화는 무엇보다도 향기가 압권인데 살랑이는 바람을 타고 와서 은은하게 뇌를 자극하는 향은 정말 꿀처럼 달콤하다. 주변에는 생강나무와 산수유가 이미 꽃을 피웠고 흰민들레와 제비꽃, 현호색 등 풀꽃들도 피었지만 매화가 피고서야 봄이 제대로 다가온 느낌이다. 이른 아침 고조된 새소리의 맑은 톤은 몽롱하게 잠긴 의식을 두드려 깨워서 또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데, 초목도 대기가 햇볕에 상승기류를 타듯 땅속에서 새싹을 틔우고, 마른 가지에서 잎을 내고 또 열심히 꽃을 피우고 있다.

초막골의 꽃들 2026.03.30

냉이 캐기

삼월에 들면 벌써 남도의 꽃 소식이 지면과 화면에 차고도 넘치지만 대덕산 아래 깊이 들어앉은 산골에는 아직도 겨울 끝자락 추위가 여전하다. 얼어붙은 지하수는 채 녹지 않았고 밤새 땅덩이들은 돌처럼 굳었다가 한낮에만 잠깐 동안 풀리곤 하는데, 냉이와 꽃다지, 별꽃 무리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치 기지개를 켜듯 굳었던 언 잎을 털어 일으키고 또 작은 싹들을 땅 위로 틔워낸다. 노지에서 겨울을 난 냉이 잎은 얼었다가 녹기를 거듭한 탓인지 거의 황토색 이어서 처음엔 눈에 잘 띠지 않다가 익숙해 져야만 보이기 시작한다. 손끝에서야 겨우 만져지는 요런 작은 냉이를 하나하나 캐서 흙과 잔뿌리를 털고 바구니에 담는 지금의 이 여유가 시간이 천금만금같다는 세상에서 참 한가롭구나 싶기도 하지만, 너른 밭 한..

초막골 먹거리 2026.03.09

가을 마곡사

오래 알고 지낸 편한 사람들과 숲 깊은 곳에 자리한 유서 깊은 절집을 찾아 떠나는 발걸음은 나이도 세월도 모두 무관한 듯 즐겁고 상쾌한 기분 일색이었다. 게다가 맑은 하늘에서 내리는 따듯한 햇볕과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계곡을 흐르는 청랑한 물소리 더없이 정겨운데, 버들치 떼 유영하는 맑은 여울 위 돌다리를 건너면 배경 화면처럼 즐비하게 둘러선 높은 산 아래 유서 깊은 천년 고찰이 한결같은 고즈넉한 분위기로 맞이한다. 춘갑사추마곡으로 불리어 익히 기대했던 화려한 단풍의 풍광은 늦가을까지 이어지는 더위의 뒷끝 탓인지 아직 볼 수 없었지만, 늘 푸른 백범선생의 향나무와 뒷산의 쭉쭉뻗은 송림군락, 고찰의 명성에 걸맞는 우람한 노거수들을 만나서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숲탐방 이야기 2025.10.31

두꺼비 친구

폭염이 머물고 있는 한여름의 절정에서 그나마 땅속 깊숙한 곳에서 솟는 차가운 지하수는 숫제 샘가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샘터에는 벌과 나비도 목을 축이러 오고, 가끔 개구리와 산새도 오곤 하는데, 요즘 아예 터를 잡고 사는 친구가 하나 있다. 그 맵시를 보자면 또렷한 이목구비 중에서도 꾹 다물고 있는 입은 식탐깨나 있게 생겼는데 그 속에서 길쭉한 혀가 뻗어 나와 먹이를 낚아채는 모습이 마치 전광석화 같다. 오동통한 팔다리와 길쭉이 뻗은 손가락에 검은색 매니큐어를 바른 듯 손톱은 윤이 나고, 얼룩갑옷 외투로 가린 퉁실퉁실한 외모와 그에 걸맞는 진중한 움직임, 주위의 그 무엇도 의식하지 않는 당당한 태도가 매력이 있다. 이른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러 샘터로 가면 조용한 ..

초막골 식구들 2025.07.29

산수국과 접시꽃

철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날씨가 우리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큰 것 같다. 여름의 한 가운데 어김없이 찾아오는 장마는 잦은 비와 더불어 공기 중에 수분이 많아서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처지고 자칫 마음까지도 가라앉는데, 그 기분을 위로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 푸른 하늘빛 산수국과 작열하는 태양을 닮은 접시꽃이 피어서 눈을 맑게 한다.

초막골의 꽃들 2025.06.27

벌깨덩굴과 긴병꽃풀

벌깨덩굴과 긴병꽃풀은 봄날 숲 깊은 산길에서 연자주색 꽃부리를 늘어뜨린 통꽃의 모습으로 쉽게 만날 수 있다. 긴병꽃풀은 벌깨덩굴 보다 꽃이 좀 더 작고 사방으로 줄기를 뻗어서 주변을 온통 뒤덮고 마는 속성이 있는데 둥근 부채처럼 생긴 잎도 귀엽고 앙증맞다. 벌깨덩굴은 짙은 자주색 줄무늬 반점이 점점이 박힌 화관을 늘어뜨리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끝부분에 가느다란 터럭이 잔뜩 돋아 있어 용도가 자못 궁금하다.

초막골의 꽃들 2025.05.01

봄꽃 위에 눈꽃

어제와 그제는 산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만개한 벚꽃 구경도 하고, 빼꼼 돋아난 두릅이랑 엄나무순, 참취, 까실쑥부쟁이 등을 채취해서 봄맛을 즐겼다. 앞산은 청풍호 기슭에서 산정까지 마치 물감을 찍어서 쓱 밀어놓은 붓 터치처럼 연둣빛 농담이 다양한데, 간혹 연분홍 꽃나무가 점점이 박혀있어 화사하다. 봄은 똑같은 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참 변덕스럽고 난해하기 그지없는 계절이다.올해도 이상 고온과 한파를 오가며 예측 불가능한 날씨 행보를 거듭하더니,  이제 사월이 되고 꽃도 화려하게 피어서 기다리던 봄이 왔구나 싶은 차에 간밤에 쏟아진 눈에 세상은 푹 파묻혀 버리고 난데없이 봄꽃 위에 눈꽃 세상이 되었다.

초막골의 풍경 2025.04.13

광대나물 꽃

3월의 볕 아래 얼었던 땅이 녹고 폭설에 묻혔던 대지가 드러나자마자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작고 여린 풀들은 저마다 꽃피울 준비에 바쁜데,  냉이, 꽃다지, 별꽃, 제비꽃, 현호색 등 다들 고만고만한 모양과 자태로 봄볕 바라기의 경쟁 틈바구니에서 올해에는 광대나물이 가장 먼저 꽃을 피웠다.  알록달록 고깔모자를 쓰고 춤추던 어릿광대를 연상케하는 이름에서부터 치어리더의 경쾌한 손동작이 연상되는 꽃과 줄기, 잎들의 조화가 재미있다.

초막골의 꽃들 2025.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