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깨덩굴과 긴병꽃풀 벌깨덩굴과 긴병꽃풀은 봄날 숲 깊은 산길에서 연자주색 꽃부리를 늘어뜨린 통꽃의 모습으로 쉽게 만날 수 있다. 긴병꽃풀은 벌깨덩굴 보다 꽃이 좀 더 작고 사방으로 줄기를 뻗어서 주변을 온통 뒤덮고 마는 속성이 있는데 둥근 부채처럼 생긴 잎도 귀엽고 앙증맞다. 벌깨덩굴은 짙은 자주색 줄무늬 반점이 점점이 박힌 화관을 늘어뜨리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끝부분에 가느다란 터럭이 잔뜩 돋아 있어 용도가 자못 궁금하다. 초막골의 꽃들 2025.05.01
광대나물 꽃 3월의 볕 아래 얼었던 땅이 녹고 폭설에 묻혔던 대지가 드러나자마자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작고 여린 풀들은 저마다 꽃피울 준비에 바쁜데, 냉이, 꽃다지, 별꽃, 제비꽃, 현호색 등 다들 고만고만한 모양과 자태로 봄볕 바라기의 경쟁 틈바구니에서 올해에는 광대나물이 가장 먼저 꽃을 피웠다. 알록달록 고깔모자를 쓰고 춤추던 어릿광대를 연상케하는 이름에서부터 치어리더의 경쾌한 손동작이 연상되는 꽃과 줄기, 잎들의 조화가 재미있다. 초막골의 꽃들 2025.03.13
풍선덩굴과 새깃유홍초 푹푹 찌는 한여름의 무더위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공중으로 증발시켜 버린 듯 땅을 밟고 있어도 몸이 허공에 붕 떠서 아지랑이처럼 타오르는 것 같다. 지금 처마엔 가득 부푼 풍선처럼 살짝만 건드려도 빵빵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자아내며 풍선덩굴이 열매를 늘어뜨리고 있는데 그 속에는 하트 무늬 선명한 둥근 씨앗 두세 개가 들어있고, 풍선덩굴과 얽히고설키어 한 몸처럼 되어버린 새깃유홍초는 어둡고 복잡한 넝쿨 속을 비집고 꽃대를 길게 뽑아내서 붉고 선연한 별꽃을 피웠다. 초막골의 꽃들 2024.08.05
고모님과 산수국 꽃 안동 사시는 고모님은 1932년생, 우리 나이로 구십 세 살이다. 여전히 기억력이 좋아서 먼 옛날 소싯적 이야기들을 친정 조카들에게 들려주기를 좋아하시는데, 시골 부자였으면서도 동생에겐 한없이 매정하고 인색했던 큰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야속함이 뼈에 사무친 까닭에 아직도 말씀 마디마디엔 한숨이 섞인다. 이야기의 대강을 꿰어 보면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병술 흉년에 할아버지가 고모와 할머니 사별 후에 재혼한 새어머니, 그리고 이복동생인 어린 두 딸과 함께 이제껏 살던 고향을 떠나 밥벌이를 위해 강원도 태백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때 고모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그런데 이사를 하고 머지않아 할아버지가 갑자기 병을 앓아서 눕게 되었고, 일을 못하니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기를 밥 먹듯이 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초막골의 꽃들 2024.06.14
캐모마일 캐모마일은 다이소 원예코너에서 꽃씨를 사다가 심었는데 작년 봄에 새싹이 돋아서 여름내 꽃을 피우다가 가을 즈음엔 주변에 또 싹을 틔웠다. 겨울 맹추위가 만만치 않았는데도 한 포기도 죽지 않고 살아서 울타리 옆에 옮겨 놓은 그대로, 흰 쟁반에 황금을 담은 듯한 꽃을 피우고 있다. 꽃이 제대로 성숙하면 따다 말려서 허브차를 끓여 먹는데 이른 새벽의 고요하고 맑은 분위기처럼 향기가 은은하고 차분해서 취향에 맞는 것 같다. 초막골의 꽃들 2024.05.30
산마늘꽃 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계절은 어느덧 하얀 찔레꽃, 아카시 꽃향기 흩뿌리는 오월 상순 끝자락에 닿아 아침 공기는 맑고 푸른 산색은 정갈해서 상쾌하다. 산나물과 푸성귀 나물 식단을 즐기며 남루한 입성과 오막살이 작은 거처에도 괘념치 않고 편하게 살아가는 지금이 어쩌면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들, 햇봄에 텃밭 산마늘을 포기마다 한 잎씩 따서 슴슴하게 담근 장아찌는 아직도 녹색을 잃지 않고 마늘 향도 은근한데, 남겨진 산마늘잎 속에서 긴 꽃대가 하나씩 하늘 향해 솟더니 폭죽 터지는 모습을 닮은 방사형의 꽃다발을 달았다. 자세히 보아야만 보이는 그 작고 미미한 송이 하나하나에서 지금 막 꽃이 피고 있는데, 크건 작건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꿈과 희망이 담겨있기 때문이겠지. 초막골의 꽃들 2024.05.11
라일락꽃 향기 우리 세대에 봄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꽃향기를 꼽으라면 물론 매화도 있고 아카시와 찔레꽃도 있지만 나는 선뜻 라일락꽃 향기라고 얘기하고 싶다. 월동의 긴 수면에서 막 깨어나 온화한 햇볕이 한 사나흘 대기를 데우면 골목길 담장 너머 어디에선가 은은한 꽃향기가 번지는데 대부분이 라일락일 경우가 많다. 이른 봄 라일락꽃 향기를 맡으면 곧장 머릿속 어딘가에 깊숙이 묻어둔 추억의 저장고가 열리고 서둘던 발걸음은 최면에 걸린 듯 스르르 멈춰 서고 만다. 나의 경우는 가수 윤형주씨의「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던 날 교정에서...」한 소절의 맑고 고운 고음이 귓전을 맴돌다가 입에 붙어서 한참을 자동으로 흥얼이게 되는데, 어쩌면 외롭고 쓸쓸했던 빈털터리 젊은 날에도 곱고 아름다운 향기에 끌려서 봄은 그런대로 .. 초막골의 꽃들 2024.04.30
봄꽃 릴레이 오늘도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는데 올봄은 그 어느 해 보다도 비가 잦고 날씨도 따듯해서 초막골 주변 꽃들의 릴레이도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냉이, 꽃다지, 현호색, 봄맞이꽃 등 작은 풀꽃들은 말고, 한 무리씩 피어서 존재감이 확실한 봄꽃들의 축제는 이제 거의 끝이 나서 산은 짙푸르고 뜰에 심어놓은 라일락과 모란이 막 개화를 시작하는데, 이어서 고광나무와 쪽동백, 박쥐나무, 아까시, 층층나무가 꽃을 피우고, 6월 어름엔 밤나무와 말채나무가 또 꽃을 피우겠지만,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봄볕 아래에서 진달래, 생강나무부터 시작된 봄꽃들의 이어달리기는 산수유와 매화를 거쳐 개나리, 앵도, 살구, 개복숭아와 조팝, 그리고 산벚꽃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물론 그사이에 .. 초막골의 꽃들 2024.04.24
산복사꽃 인생이란 한정된 시간의 눈금자를 하루하루 채워가는 가운데 어느 한순간, 한 시절인들 금쪽같이 않은 때가 있었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연두색 화폭에 붉은 점 하나 찍어 놓은 듯 초봄에 피는 산복사꽃 같이 분홍빛 연정으로 가슴이 타오르던 청춘의 시절에 비할 게 또 있을까? 큼지막한 분홍 꽃잎을 나풀거리며 씨방 깊숙이 숨은 정열 수술을 통해 뿜어내는 듯한 산복사꽃 열기에 주변 노거수 잎눈이 잠에서 깨어난다. 초막골의 꽃들 2024.04.09
돌배나무 꽃 벌써 8여 년이나 되었나? 친구네와 평창서 늦은 여름 휴가를 보내다가 오대산 상원사에 들렀는데, 절 마당 한적한 곳에 돌배나무가 노랗게 익은 열매를 잔뜩 떨어뜨리고 있었다. 난 주위의 그 무엇도 의식하지 않고 어린 시절의 예민한 후각과 침샘의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향기 짙고 시큼 달큰한 추억의 열매를 주워서 우적우적 거침없이 씹어 먹었다. 겨우 탁구공보다 조금 큰 정도의 돌배는 바람에 스치고 가지에 부대껴 자란 탓인지 모양은 거칠고 색깔은 탁하지만 감동적인 향과 짙고 강한 맛은 한번 맛보면 잊히질 않는다. 그때 먹고 가져온 씨앗을 심었더니 몇 개가 발아되어 싹을 틔웠고, 밭으로 옮겨서 봄마다 거름 주고 나름 애지중지하며 키웠더니 올해엔 먼저 성장한 한 그루.. 초막골의 꽃들 2024.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