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막골의 꽃들 139

봄비 내린 후

드센 꽃샘바람에 움츠러들었던 기운과 미세먼지로 탁한 대기까지 말끔하게 씻긴 듯한 봄비가 내린 후 지금 산골엔 온갖 땅속뿌리들과 씨앗들이 녹진해진 흙을 밀치며 생명의 새싹들을 틔워내고 있다. 매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등 일찍 꽃을 피우는 봄꽃나무들의 잔치는 벌써 며칠 전에 시작됐으니 이제 곧 넉넉한 토양의 유기물을 자양분 삼아 세상의 봄꽃이라는 꽃들은 모두 다 피어날 태세인데, 이 봄날 아름다운 꽃들의 자태가 정신을 쏙 빼놓기도 하지만 우린 그저 눈에 띄면 띄는 데로 봄꽃들의 다양한 맵시와 향기를 감사하며 즐길 준비 밖에...

초막골의 꽃들 2021.03.28

목화꽃과 열매

기억에 담겨있는 세월의 자취들은 모두가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데 둘러보면 생활 환경이나 먹고 사는 일들이 참 많이도 바뀌었다. 목화를 키워서 씨를 빼고 물레를 자아 무명실을 만들던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나니 이제 고향을 찾아도 목화밭을 볼 수가 없다. 한여름 동구 너른 밭에 연노랑과 분홍빛 목화 꽃송이가 넘실대면 통통한 풋열매의 껍질을 벗기고 달짜근한 즙을 빨던 유년의 추억도 모두가 한순간 봄날의 꿈이던가! 오랜 야생에서 체화된 본능과 어미 뒤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얻은 경험을 생존술로 삼는 동물들처럼, 나 또한 어릴 적 겪었거나 익힌 것은 잘 잊히지 않아서 화분 가득 꽃피운 목화 꽃과 열매를 바라보며 삶이 따듯했던 먼 기억의 저편을 반추하네. >> 갓 피었을 땐 노르스름한 미색이었다가 >> 시간이 ..

초막골의 꽃들 2020.08.11

붉은 꽈리

맑고 경쾌하게 들리던 빗소리도 이제 제발 그만 좀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올 장마는 길다. 짙은 비구름 아래 어둡고 습한 시간이 계속 이어지니 나풀나풀 날개짓과 총총한 눈빛으로 집 주변을 돌며 벌레를 잡던 곤줄박이들도, 붉고 화사한 꽃을 피워 나비와 벌을 유혹하던 여름꽃들도 빗줄기에 푹 고개 숙인 모습이 초췌하고 쓸쓸하다. 이러한 우중에도 주변은 빈틈없이 초록색으로 채워지고 토담 아래 꽈리 송이들은 붉고 통통하게 익어가는데, 그 모습이 만국기 펄럭이던 운동회날 오재미를 던져서 터트리던 울긋불긋 치장한 박처럼 고와서 슬쩍 한번 손톱을 튕겨 터트려 보고 싶다.

초막골의 꽃들 2020.08.09

어수리 꽃

경의중앙선 팔당역이 개통되기 전까진 예봉산은 비교적 사람들에게 덜 알려져서 호젓한 등산로에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참 아름다운 근교 산행지였다. 한여름에도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땀을 식혀주었고 사람 발길이 드문 산길 주변엔 야생화가 즐비하게 피었는데 어수리도 제법 흔하게 만난 꽃이었다. 그 뒤 강원도 깊은 산행에서나 종종 볼 수 있었던 어수리를 어느 봄날 오일장에서 만난 건 어수리가 산나물로 인기를 얻어서 모종을 팔면서부터인데 지금 뒷밭에 꽃을 피운 것은 작년에 사다가 심은 것이다. 산골에 살면서 이곳에 없는 야생화를 하나둘 늘려가며 꽃을 보는 재미도 좋지만 봄철 개성 깃든 향긋한 산나물을 맛보며 오감이 행복한 순간들도 너무 즐겁다. >> 2003. 7.20 촬영

초막골의 꽃들 2020.08.06

장마철 풍접초

인간 개개인이 거대한 우주 속 또 하나의 소우주라고 하더니 주변 환경이나 날씨가 심신에 끼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지속되는 장맛비와 흐린 날씨로 인해 몸도 마음도 축축이 젖고 침체된 의식과 흐릿한 눈빛은 사그라진 잿불처럼 미지근한데, 여기 마치 “내가 이깟 날씨에 따라 변할 것 같소?”라고 항변하듯 시원스런 자태와 맑은 색깔로 몸과 맘을 씻어주는 꽃, 풍접초.

초막골의 꽃들 2020.08.01

장다리꽃

한여름 폭염 속을 가냘픈 목줄기를 길게 빼 올린 채 바람에 일렁이는 노란 꽃무리 제 이름 겹삼잎국화 보다 장다리란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마을 텃밭 주변의 붙박이 꽃, 지난날 고된 흉년의 한 때엔 여린 싹 베어다 나물죽을 끓여 먹으면 금새 쑥쑥 자라곤 해서 주린 배를 채웠던 기억으로 사람들에게 꽃나물로 칭송 받는, 큰 키에도 속은 결코 싱겁지 않은 노란 겹잎장다리꽃.

초막골의 꽃들 2018.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