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운동회
맑은 가을 날, 넓은 공설운동장 가장자리에
쳐 놓은 천막 안에서는 아침부터 앞치마를
두른 부녀회원들이 향토음식인 메밀전을
얇게 부쳐서 우선 소주부터 한잔씩 권한다.
"제17회 청풍면민 한마음 축제"라고 쓰인
현수막을 매단 붉은 애드벌룬 높이 떠 있고,
파란 잔디위엔 횟가루로 구획을 해서 투호,
돼지몰이, 물동이 이고 달리기, 윳놀이 등
게임을 위한 다양한 도구들이 놓여 있다.
빨간 모자를 쓰고 가슴에 '진행' 표찰를 단
주민센터 직원들과 체육회 회원, 이장님들은
전면 본부석과 행사장 곳곳을 바쁘게 오가며
대진표와 선수단 점검에 여념이 없다.
오전 10시 정각에 체육회 총무의 사회로 행사가
시작되자 면민들은 리동 건제순으로 배치된
자기 동네 명판 뒤에 길게 두줄로 늘어서고,
높은 단상에는 면장을 비롯한 충북도 북부
출장소장, 단위농협 조합장, 파출소장, 자매
결연 도시의 주민대표 등 각급 유지들과
초청된 내빈들이 각기 직분에 맞는 양복과
제복 차림으로 자리해서 소개를 받고 있다.
스물일곱 동리에 인구 천삼백의 호젓한
청풍면 가을 운동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황석리는 그 중에서도 인구가 가장 적지만
열성적인 이장님의 독려로 참석율은 젤 높아
최근에 귀촌한 네 가족 여덟명을 포함해서
총 열일곱 명의 주민들 중 열셋이 참가하였다.
게임 시간이 겹치는 관계로 겨우 윳놀이 밖에
출전을 못했지만 올갱이국과 배추김치에
수육을 싸서 같이 맛있게 점심도 먹고,
또 한 팀이라는 동질감에 서로를 격려하며
권하는 한잔 술에서 첫 대면의 서먹함은
금새 사라지고 모두들 편한 이웃이 되었다.
참가자 수에 비해서 기증된 경품도 풍성해서
생전 추첨으론 무얼 타 본 기억이 별로 없던
우리도 감자 10kg 한 박스가 당첨되었는데,
모처럼 좋은 가을 볕 아래에서 삶의 모든
진지함과 무거움 털어버리고 가볍게 웃을 수
있었던 건 분명 축복인 것 같았다.